몸 던져 진실 알린 김의기 열사…"광주 밖 5·18도 기억해주길"
5·18 진압 사흘 뒤 서울서 진상규명 외치며 투신…누나 김주숙씨 인터뷰

[김주숙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내 행복의 절반이라도 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자랑스러운 동생이었죠. 동생뿐 아니라 광주 밖에서 5·18을 알리려 목숨을 바친 분들도 많이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5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고(故) 김의기(사망 당시 21세) 열사의 누나 주숙(69)씨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980년 5월 30일 서강대 4학년생이었던 김의기는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6층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투신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직전 아침 식사를 함께한 것이 동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며칠 뒤 서울 미아리의 한 다방에서 만나자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동생은 나오지 않았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한 것은 동생이 사라진 지 약 2주 뒤였다. 형사 두 명이 별안간 집에 들이닥쳐 이곳저곳을 뒤지더니 어머니와 김씨에게 '동생이 기독교회관에서 떨어졌다'고 전한 것이다.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죠. 떨어진 동생이 꿈틀거리는데 계엄군들이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고 현장에 떨어진 유인물부터 주웠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목격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데 기가 막혔죠."
김의기는 5월 19일 농민운동 행사에 참석하려 광주에 들렀다가 엿새 동안 계엄군의 학살을 목격했다. 충격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신문에는 카지노사이트 순위 한 줄 실리지 않았고 머지않아 미인 선발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요란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되고 사흘 뒤 김의기는 기독교회관에 올라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계엄군 장갑차 사이로 떨어져 숨졌다.

[김주숙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의기는 6남매 중 막내였다. 주숙 씨는 "제 월급날만 되면 친구들을 데리고 와 중국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달라고 하곤 했다"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고 노래도 가르쳐주던 자상한 동생이었다"고 떠올렸다.
동생은 농촌 목회자의 꿈을 꾸며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4학년을 다 마쳤는데 왜 졸업하지 않냐"는 누나의 물음에 "가난한 친구의 한 학기 등록금을 대줘서 더 다녀야 할 것 같다"며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다.
김의기의 관에는 주숙 씨가 대학 입학 선물로 사준 양복 한 벌이 들어갔다. "좋은 옷을 입으면 편해지고 싶고,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어서 도둑 같은 마음이 든다"며 끝끝내 입지 않던 양복이었다.
김의기의 투신은 광주의 참상을 처음 바깥으로 알린 사건으로 기록됐다. 김의기는 2021년에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살아있다면 환갑을 넘겼을 동생은 백발의 누나에게 여전히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동생이 떠난 뒤 경찰이 툭하면 집에서 온갖 것들을 가져가는 바람에 변변한 사진 몇 장 남아있지도 않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는 한강 작가의 말이 와닿았어요. 산 자들이 죽은 자의 희생으로 깨우치면서 역사가 우리를 살리는 거죠. 나중에 동생을 만난다면 '애썼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덕분에 네가 원하는 세상으로 조금씩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고…."

(광주=연합뉴스) 김혜인 기자 =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오월 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2025.5.17 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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