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 김원의 사람 이야기(10) 장교 이환희의 추억②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카지노 사이트 꽁머니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제공, 사진가 김중만 작품
지난 칼럼에 이어 필자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공군 장교 이환희에 대한 추억을 다시금 써본다. 나는 이환희 대위의 기숙사 룸메이트 제안을 받고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심지어는 사감이었던 교수가 우리 방을 찾아와 책장을 모두 뒤져 '사상계'(思想界·1953년부터 1970년까지 발행된 월간 시사잡지로 장준하, 서영훈 등이 주도해 창간. 당대 지식인과 학생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음)를 너무 많이 본다고 문제 학생으로 선정해 선도 차 자주 방문을 일삼았다. 그 이후에 기숙사 사감이었던 다른 교수는 매일 밤 우리 방만 점검하고 수위 아저씨에게 우리 두 사람의 기숙사 출입 시간을 보고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다.
우리가 그에 항의해 나의 친구 남신우는 술김에 3층 베란다에 나가 뛰어내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사감은 그런 신우를 잡아다가 -나의 적절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따귀를 때리는 횡포를 부렸다.
물론 그 따귀 사건은 "술이 깨라고 볼을 툭툭 쳤다. 심했다면 미안하다"는 사감의 사과로 일단락됐지만, 하여튼 우리가 최고의 사고뭉치였음은 온 기숙사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한 놈이 오늘 하루 술을 좀 쉬어 볼까 생각해도 나머지 한 놈 때문에 그게 안 되는 게 탈이었다.
그래서 그 학기에 나와 이 중위는 룸메이트가 됐다. 강의실에서만 봤던 그의 단정했던 겉모습은 기숙사의 사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취침 시간, 기상 시간이 무슨 사관학교라고 그렇게 철저히 지켜야 하는지 그 철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 공부도 예습과 복습을 초등학생처럼 따로 나눠서 하게 했다.
시험공부는 물론 한 달 전부터 계획표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누가 시키고 감시라도 하는 듯이 그 계획대로 따라 하며, 하여간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내게는 마음에 들지를 않아서 나는 늘 핀잔을 줬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씩 웃으며 "야, 내가 너희들처럼 놀 수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문제는 우리 방 두 식구의 생활 풍속이 남신우와 있을 때처럼 보조를 맞추지를 못하고 너무 차이가 나는 데 있었다.
예컨대 내가 술을 마시고 열두 시, 한 시, 때로는 두 시를 넘어서 방에 들어오면 내 룸메이트는 곤히 잠든 시간이고, 내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깨었을 때 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고, 내 옷가지들까지 모두 개어져 있거나 옷걸이에 잘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는 항상 손걸레를 빨아 와서 바닥에 꿇어앉아 방을 닦았다. 혹시라도 내가 청소한다면서 대걸레를 쓰는 걸 보면 그랬다.
"야, 이 손바닥만 한 방을, 고만. 내가 할게."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알았어요, 취미는 못 말리지"라고 다시 드러눕곤 했다.
그는 그때 이화여대에 다니는 여학생과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고 있었는데, 주말이면 꼭 룸메이트인 나를 데이트에 동행시키고 싶어 했다.
물론 나도 토요일이면 할 일이 많은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이었기에 한사코 사양했지만 그래도 몇 번은 예의상으로라도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또한 이 아저씨가 왜 나를 꼭 데리고 가려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대답인즉 내가 거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래요. 우리 고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이 되라고 가르쳤으니…"
그이는 내 복장에도 신경을 쓸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내 구두까지 닦아 주면서 합동 데이트를 서둘렀다. 사실 나는 구두를 닦아 신어 본 적이 없어서 내 구두는 정말로 엉망이었다.
핑계는 어찌 내가 구두닦이 소년 앞에, 의자에 앉아서 발을 내밀고 닦아 주기를 기다리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꿇어앉아 닦기는 싫고….
그러고 나면 이 중위는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내 윗입술을 붙잡고 내 코 밑을 면도칼로 싹싹 밀어줬다. 이발소에서 말고 집에서 면도라는 걸 해 본 건 그것이 내 생전 처음이었다.
하여튼 우리 데이트는 태릉에서 중랑교, 청량리를 거쳐 신촌까지 두 남자가 가는 장장 두 시간의 버스 여행으로 시작해 신촌의 이화여대 근처에서 이 중위의 애인을 만나 세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이 되는 데서 시작된다.
신촌 기차역 근처에서 자취하면서 이대 법대에 다니고 있던 그 대구 출신 규수는 나를 무척 좋아해 줬다. 나에 대한 그의 호칭은 '원이 학생'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호칭은 '박광지 씨'였다.
우리는 그 작은 문간방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 김치찌개에 두부 부침에 정말로 맛있게 나눠 먹었다. 쌀과 밥 자체가 기숙사의 증기솥 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물론 김치만 해도 그 맛을 못 잊어 일주일을 기다릴 정도였다. 그러고는 영화를 보거나, 이대 캠퍼스나 연대 뒷산을 걸었다.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이 중위는 박광지 양과 결혼해 대구의 K2 비행장에 있던 공군부대의 시설 장교로 일하면서 부대 부근에 작은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학교에 다닐 때처럼 이 대위는 우리를 초대해 술 마시기 좋아했다. 마침 졸업 후 공군에 시설 장교로 간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그들도 함께 가끔 그 신혼집에 모이곤 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그는 소령으로 진급해 서울에 있는 공군 전대의 시설과장으로 왔고, 또 가끔 모여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아주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이 소령이 암에 걸려서 오래 못 살 것이라는….
우리는 소식을 듣는 즉시 대방동에 있던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집 안에 틀어박혀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런 상황을 몹시도 억울해했다. 우리는 그가 겪었던 여러 가지 불운이 오랜 기간 스트레스가 되어 쌓여서 암이 되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벽을 주먹으로 치며 탄식하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 옆에서 바라보기에도 슬픈 광경이었다.
그 옆에는 절망에 빠진 아내가 있었고, 중1, 중3, 두 아들이 물끄러미 절규하는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05년 서울대 공대 건축과 전체 동창회가 열린 조선호텔에서 잘생긴 젊은이 하나가 우리 동기생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 찾아왔다.
본인이 이름을 이승훈(李昇勳)이라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 이 친구가 그때 슬프게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빈소를 지키고 앉았던 까까머리 중학생, 이환희 소령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뜻을 따라 서울공대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과를 지원해 4년을 지내고 42회로 졸업해 지금은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젊은 소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반갑게 그를 맞아 근황을 물으며 함께 술을 마셨다.
나는 그 어머니, 옛날의 그 박광지 씨의 안부를 물었다. 그 어머니는 건강하고 가끔 골프도 치며 잘 지낸다고 했다.
잘 지낸다니!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만일 그 부인과 아들이 아버지의 타계 이후 계속 고생만 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 지금도 가끔 60여년 전 이환희 대위와 함께했던 기숙사 시절을 떠올려본다.
김원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원 카지노 사이트 꽁머니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